서울 삼전도비 사진
사적101유적지조선 인조 17년(1639)

서울 삼전도비

서울 三田渡碑

서울특별시 송파구

기본 정보

지정 등급
사적101
분류
유적지
제작시대
조선 인조 17년(1639)
지정 연도
1963
소재지
송파구, 서울특별시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 47
좌표
37.510523, 127.101642

AI 도슨트가 들려주는 이야기

✨ AI 해설

병자호란 패배 후 청태종의 공덕을 새긴, 서울 삼전도비예요. 인조 17년(1639) 세워진, 높이 3.95m의 '대청황제공덕비'랍니다. 인조 14년(1636) 청태종이 10만 대군으로 침입하자,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던 인조가 결국 삼전도 나루터에서 항복하며 세워졌어요. 비문은 이경석이 짓고 오준이 글씨를 썼답니다. 앞면엔 만주글자와 몽골글자, 뒷면엔 한자가 새겨져 있어요. 굴욕의 역사와 함께 만주·몽골어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는 비석이에요.

⚠ AI가 국가유산청 공식 정보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해설입니다. 정확한 정보는 아래 공식 설명을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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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병자호란 때 청에 패배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종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이다.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워진 비석으로 높이 3.95m, 폭 1.4m이고, 제목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되어있다. 조선 전기까지 조선에 조공을 바쳐오던 여진족은 명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 급속히 성장하여 후금을 건국하고, 더욱더 세력을 확장하여 조선을 침략하는 등 압력을 행사하면서 조선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였다. 나라의 이름을 청으로 바꾼 여진족이 조선에게 신하로서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하자 두 나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결국 인조 14년(1636) 청나라 태종은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직접 조선에 쳐들어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남한산성에 머물며 항전하던 인조가 결국 청나라의 군대가 머물고 있는 한강가의 삼전도 나루터에서 항복을 하면서 부끄러운 강화협정을 맺게 되었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했고 그 결과 삼전도비가 세워졌다. 비문은 이경석이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은 여이징이 썼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만주글자, 오른쪽에는 몽골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어 만주어 및 몽골어를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자료이다. 2010년 3월에 송파구 석촌동 289-3번지에 위치하던 비석을 고증을 통해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삼전도비 → 서울 삼전도비)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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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공공누리 (khs.go.kr) · 데이터 출처: 국가유산청 오픈API (국가유산포털 ↗) · AI 해설: claude-sonnet-5 기반 사전 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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