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례 석주관 칠의사묘
求禮 石柱關 七義士墓
전라남도 구례군
기본 정보
- 지정 등급
- 사적 제106호
- 분류
- 유적지
- 제작시대
- 조선시대
- 지정 연도
- 1963년
- 소재지
- 구례군, 전라남도—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산 171-1
- 좌표
- 35.197311, 127.566092
AI 도슨트가 들려주는 이야기
✨ AI 해설정유재란 때 석주관을 지키다 숨진 7명의 의사를 모신, 구례 석주관 칠의사묘예요. 석주관은 영남과 호남을 잇는 4대 관문 중 하나로 군사적 요충지였답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왕득인이 의병을 일으켰지만 전사했고, 그의 아들과 각지의 의병·승병이 힘을 합쳐 처절한 혈전을 벌였어요. 순조 4년(1804) 7명 의사에게 관직이 내려졌고, 1946년 칠의각과 영모정이 세워졌답니다. 호남 의병 정신을 간직한, 정말 숭고한 유적이에요.
⚠ AI가 국가유산청 공식 정보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해설입니다. 정확한 정보는 아래 공식 설명을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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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정유재란 때 전라도지방의 관문이었던 석주관을 끝까지 지키다가 숨진 구례출신 의사(義士) 7명의 무덤이다. 석주관은 경상도지방에서 전라도지방으로 통하는 관문으로서 군사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안음의 황석산성·진안 웅치·운봉 팔량치와 함께 영남과 호남 사이의 4대 관문의 하나로, 고려때부터 이곳에 진영이 설치되어 왜군의 침략을 막았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왜군은 호남지방을 목표로 하여 이곳을 집중공격하였다. 그러자 왕득인이 의병을 일으켜 적에게 대항하였으나 결국 숨지고 말았다. 그후 왕득인(王得仁)의 아들과 각 지역에서 모여든 의병·승병들이 힘을 합쳐 처절한 혈전을 전개하였으나, 역시 대부분의 의병을 희생시킨 채 끝나고 말았다. 순조 4년(1804) 나라에서 왕득인을 포함한 7명의 의사에게 각각 관직이 내려졌고, 1946년에는 뜻있는 지방 유지들에 의해 칠의각과 영모정이 세워졌다. <br/><b>※(석주관칠의사묘 → 구례 석주관 칠의사묘)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b>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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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공공누리 (khs.go.kr) · 데이터 출처: 국가유산청 오픈API (국가유산포털 ↗) · AI 해설: claude-sonnet-5 기반 사전 생성


